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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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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이 모두 향교의 연원으로 문헌비고에 ‘고려 충렬왕 때에 강릉안찰사인 김승인(金承印)이 화부산(花浮山) 석적암(碩滴巖) 아래에 향교를 창건하자, 각지에서 향교가 이어서 일어났다.’ <고려사>에 ‘인종 5년에 지방에 향교를 세우고 교육을 확충하라.’또‘인종 20년 2월에 지방의 생도들이 계수관향교(界首官鄕校)에 모여 글을 지었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인종 시대를 전후해서 향교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내 향교의 창건은 각 고을 향교마다 그 연대가 달라서 대부분 조선 초나 고려 말엽에 창건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을 뿐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조선시대의 향교는 지방관학으로서 지방 수령들의 지휘감독을 받았다.당시에는 봉사(奉祀)와 교학(敎學)의 기능을 철저하게 수행했으나. 일제 강점기 동안 봉사의 기능만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가 광복이후 성균관이 복원되고 각 향교에서 경전교육과 인성교육이 다시 이루어 졌다. 현재 강원도 내 조선시대의 향교가 있던 고을은 16개 향교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조선 시대의 향교가 봉사와 교학의 기능을 수행한데 반하여 건국 이후에는 현대학교가 생기고 부터 향교가 가지고 있던 전통교육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는데 횡성향교 에서는 2009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10년째 다시 경전교육을 실시 하고 있다.향교의 대성전 에서는 지금도 매년 춘. 추 두 번의 석전제(釋奠祭)와 매월 삭망(朔望) 분향(焚香)예를 하고 있다. 향교 건물 가운데 대성전과 동.서무는 제향과 관계되는 곳이고 명륜당과 동.서재는 교육과 관계되는 곳이다.
횡성향교 전설 횡성읍 읍상리 현재의 향교를 지을 때 이야기이다. 모든 설계가 끝나고 터까지 완전히 다 다져 놓은 후 도목수는 집을 지을 재목을 구하러 다니던 중 인근에는 마땅한 재목이 없자 평창의 오대산까지 가게 되었다. 과연 그곳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문제는 목재를 운반하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당시로서는 그 많은 재목을 횡성까지 운반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도목수는 횡성에 돌아 와 이 일로 며칠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향교를 지을 터에 오대산에 베어 놓았던 재목들이 마당 한켠에 그득 쌓여 있는게 아닌가.도목수는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어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날 아침 횡성에 있는 모든 소들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외양간에 매어져 있는 모든 소들이 한결같이 비지땀을 흘리며 애를 쓰는 거였다. 도목수의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워 하늘에서 횡성에 있는 모든 소들의 힘을 빌어 그 일을 해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 향교말이라는 지명은 횡성향교가 있는 읍상 5리를 말한다.향교말은 행교말, 생김말, 교동, 교촌 등으로 불리는데, 횡성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서나 향교가 있는 마을이나, 향교가 있었던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지명으로 교동이라고 하는 곳이 많다.강원도지정 문화재 횡성향교 실측조사 보고서(2012년)조사팀이 당시 청일 면사무소에 방문하여 향교말에 대한 지명을 조사하였고, 그 결과 향교말은 청일 면사무소 옆 동네(유동리)에 있었다고 확인되었다. 또한 갑천면 화전리에도 고을이 있었고, 중금리 유방준씨의 증언에 의하여 “향교골”이 지금은 중금리로 통합되었으므로 옛 부동리 골짜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천면 화전리는 본래 횡성군의 옛 고을인 화전현(花田懸)이 있던 곳으로 옛날 횡성향교가 있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1914년 큰골, 버덩말,당두곡 등을 병합하여 화전리가 되었다.그리고 부동리는 원래 가마골로 불리던 마을로, 한자로 지명을 표기할 때 가마 부(釜)자와 마을 동(洞)자를 써서 부동리라 불렀다고 하며 본래부터 횡성군 갑천면 지역으로, 1914년 부동리가 되었다. 횡성군에는 갑천면과 청일면에 향교가 있었다는 설은 있지만 언제 읍상리로 이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1971년에 대성전을 중수하면서 나온 상량문에는 위치에 대하여 확인 할 수 없지만 대성전 중수 후 중수 상량문과 함께 종도리에 기록을 남겼을 확률이 높다.상량문은 1978년에 발간한 “횡성향교지” 에 수록된 것으로 내용을 번역하려 하였으나 오자가 많아 번역이 어려워 횡성 향교지에 있는 기록문을 그대로 수록하였다. ![]() 상량문 기록문 상량문 내용 중에는 ‘淸順治 四年(1647년) 大明隆武二年 丁亥九月二十七日’ 이라는 기록과 ‘崇禎後再丁未六月十七日(1727년, 영조3)’의 기록이 있다.이상의 기록에는 목수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으며 해당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먼저 1647년의 기록은 ‘(前略)...大木 僧道雲 色史 趙應榮 木手 惠通謨生’이며, 1727년(영조3년)의 기록은 ‘大木 李世徵 禮 林英茂 木手 權天一 鄭戒巾 崔重白 金孝贊...(後略)’이다.이 기록은 1647년(인조 25년)에 당시 현감 이조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530년에 발간한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횡성현 관련 기록에 의하면 향교는 현북 3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이는 기타 옛지도에서는 읍치의 동측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아 그 위치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이전에 횡성현 북 3리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